장마 끝자락, 대승령에서 귀떼기청봉까지
장마 끝자락에 배낭을 다시 쌌다. 이번엔 내설악 쪽, 장수대에서 대승령을 지나 귀떼기청봉으로 오르는 길이었다. 예보에는 비 소식이 있었다.
새벽 들머리
전날 저녁을 챙겨 먹고 밤길을 달렸다. 고속도로 휴게소마다 불빛만 환했다.

출발 전 마지막 끼니였다. 뚝배기 하나에 반찬 몇 가지, 단출한 상이었다. 이 밥을 먹고 나면 다음 끼니는 하산 후에나 가능했다.

들머리 안내소에 닿았을 땐 이미 자정이 넘어 있었다. 전광판 시계 숫자만 어둠 속에서 밝게 떠 있었다. 차 안에서 눈을 붙이고 새벽을 기다렸다.
안개 속 능선

이정표 앞에서 산행을 시작했다. 귀떼기청봉까지 4.2km, 내설악 방면 1.8km라고 적혀 있었다. 하늘은 이미 잔뜩 흐려 있었다.

능선에 오르기 전부터 안개가 짙었다.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하늘도 온통 회색이었다.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무 데크 계단이 안개 속으로 이어졌다. 난간을 붙잡고 한 칸씩 올랐다. 발밑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구간이 이어졌다.

젖은 나무 데크 위로 등산화 끝이 보였다. 표면이 미끄러워 발끝에 힘을 주고 디뎠다. 안개가 시야를 완전히 삼킨 뒤였다.

우비 모자를 눌러쓰고 카메라를 꺼내 셀카를 찍었다. 배낭끈에 매단 물통이 그대로 걸려 있었다. 표정은 아직 여유가 있었다.

능선을 따라 걸을수록 바위가 많아졌다. 안개에 가려 봉우리 윤곽만 겨우 드러났다. 빗줄기는 굵어졌다 가늘어지기를 반복했다.

잠깐 안개가 옅어진 틈에 바위 봉우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진 한 장을 찍고 나자 다시 구름이 밀려왔다. 그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버섯처럼 생긴 바위가 능선 위에 솟아 있었다. 오랜 세월 비바람에 깎인 모양이었다. 이런 바위를 지날 때마다 걸음을 멈추고 사진을 찍었다.
귀떼기청봉

또 다른 이정표를 만났다. 귀떼기청봉까지 2.8km, 대승령 방면은 3.2km 남아 있었다. 절반 넘게 걸어온 셈이었다.

안개 사이로 뾰족한 바위 탑이 솟아 있었다. 크기를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안개가 짙었다. 능선 전체가 회색 배경 위에 실루엣으로만 남았다.

위험 구간에는 쇠난간과 사다리가 설치돼 있었다. 젖은 손으로 난간을 하나씩 붙잡고 넘었다. 빗물이 등산화 안까지 스며든 지 오래였다.

누군가 쌓아 올린 돌탑이 능선 한쪽에 서 있었다. 안개 속에서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곁을 지나며 돌 하나를 더 얹었다.

가까이서 본 바위 표면은 지의류로 얼룩덜룩했다. 붉은빛과 초록빛이 뒤섞여 있었다. 오래 비를 맞은 바위 특유의 색이었다.

능선 저편으로 바위 첨봉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안개가 걷혔다 다시 덮이기를 반복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풍경이 조금씩 바뀌었다.

바위 턱에 앉아 행동식을 꺼냈다. 물통과 약통, 정리 안 된 배낭 안쪽이 그대로 드러났다. 짧은 휴식 뒤 다시 배낭을 멨다.

장난삼아 카메라를 거꾸로 들고 셀카를 찍었다. 안개 속에서도 웃을 여유는 남아 있었다.

브이를 그리며 다시 한 장을 남겼다. 우비에 맺힌 물방울이 렌즈 앞까지 튀었다. 그사이 주머니 속 휴대폰은 이미 먹통이 되어 있었다.
능선 어딘가에서 휴대폰이 완전히 꺼졌다. 빗물이 파고든 탓이었다. 카메라는 방수 파우치에 넣고 다녀서 멀쩡했다. 이후 사진은 전부 이 카메라로만 남았다.

귀떼기청봉 정상석 앞에 섰다. 표지판에는 1,578m라고 적혀 있었다. 안개 때문에 정상에서도 조망은 없었다.
젖은 하산길

하산길에 양말을 벗어 보니 발이 하얗게 불어 있었다. 등산화 안으로 빗물이 계속 들어온 탓이었다. 깊게 잡힌 주름이 낯설었다.

탐방지원센터 앞 전광판이 오후 4시 10분을 가리켰다. 새벽에 올랐던 산을 하루 만에 다 걸은 셈이었다. 비는 그때까지도 그치지 않았다.

안내판 앞에서 마지막으로 브이를 그리며 사진을 남겼다. 산행이 끝났다는 표시였다. 젖은 옷은 그제야 무겁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차에 올라 젖은 양말을 벗고 발을 창틀에 걸쳤다.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능선을 눈으로 배웅했다. 발이 마르는 데는 한참이 걸렸다.

돌아오는 길, 도로 옆으로 이름 모를 폭포가 보여 차를 세웠다. 절벽을 타고 곧게 떨어지는 물줄기가 시원했다. 산에서 맞은 비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휴대폰 하나를 잃고 발은 퉁퉁 불었지만, 대승령에서 귀떼기청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다시 걸어볼 만했다. 다음엔 맑은 날, 같은 길을 한 번 더 걷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