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필름사진
흑백필름은 2번째 롤이다.
첫 롤보다 셔터를 조금 더 아껴 눌렀다. 동네와 출퇴근길, 외가 쪽 골목과 역 앞까지 한 롤에 담겼다. 컷 순서대로 적는다.
출퇴근길
두 건물 사이가 좁게 벌어져 있었다. 벽마다 창문 크기가 제각각이었다. 오른쪽 건물 벽에는 배관과 실외기 받침이 매달려 있었다. 틈 아래로 콘크리트 바닥이 이어졌다. 세로로 길게 세워 찍었다. 바닥에는 주차선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틈 끝으로 낮은 벽돌 담이 막아섰다.

주차장
가드레일이 오른쪽으로 길게 이어졌다. 도로는 산 옆구리를 따라 천천히 휘어졌다. 전봇대와 전선이 도로 왼편에 줄지어 섰다. 앞쪽 멀리 흰 차 한 대가 달렸다. 화면 아래 끝에 차 안쪽이 조금 걸렸다. 도로 왼쪽으로는 따로 난 길이 나란히 뻗었다. 그 길가에 어린 나무들이 받침대에 묶여 줄지어 섰다. 멀리 산이 겹겹이 옅어졌다.

퇴근길
동네 산책
흙길 위로 두 사람이 나란히 걸어갔다. 둘 다 짧은 머리에 헐렁한 바지 차림이었다. 길가에 검은 승용차 한 대가 서 있었다. 오른쪽 언덕에는 소나무가 비스듬히 자랐다. 멀리 산 아래로 건물들이 낮게 깔렸다. 한 사람은 무늬 있는 윗옷을, 다른 사람은 어두운 윗옷을 입었다. 발걸음 간격이 비슷했다. 길은 오르막으로 휘어 나무 쪽으로 사라졌다.

산책하는 할머니들
소나무 가지가 화면 위를 덮었다. 흰 옷을 입은 남자가 바위에 앉아 등을 보였다. 옆에 검은 가방 하나가 놓였다. 시선 끝으로 아파트가 여러 동 서 있었다. 오른쪽에는 전봇대가 곧게 올라갔다. 남자는 다리를 모으고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앞쪽 넓적한 바위에는 빛이 하얗게 떨어졌다. 아파트 뒤로 산 윤곽이 뿌옇게 번졌다.

쉬는 아저씨
절과 외가
큰 바위 틈에 작은 불상들이 모여 있었다. 크기와 모양이 조금씩 달랐다. 흰색이 많았고 몇 개는 색이 바랬다. 뒤쪽에 둥근 거울 같은 것이 하나 세워져 있었다. 주위로 풀잎이 바위를 덮고 자랐다. 불상들 사이에 작은 탑 모양 장식과 염주가 섞여 있었다. 흰 공 같은 것도 하나 굴러 있었다. 바위 표면은 거칠고 금이 여러 갈래로 나 있었다.

절에 있는 작은 불상들
슬레이트 지붕 끝이 담장 위로 길게 나왔다. 창문 세 칸이 나란히 났고, 나무 대문 한쪽이 안으로 열려 있었다. 담 아래에는 화분 몇 개가 놓였다. 기둥에 우편함이 붙어 있었다. 지붕 위로 둥근 안테나가 보였다. 담 위에는 기와 조각이 한 줄로 얹혀 있었다. 대문 앞 바닥에 벽돌 한 장이 놓였다. 열린 문틈으로 마당과 호스가 보였다. 담 앞에는 물뿌리개와 펌프가 서 있었다.

이제는 못가는 외가집 대문
웅천역
하늘이 낮게 흐렸다. 바닥이 젖어 빛을 받았다. 이 층짜리 역사 앞에 차가 빼곡히 섰다. 트럭 짐칸에 기아 로고 글자가 또렷했다. 역사 입구에는 유리 차양이 길게 달려 있었다. 입구 옆에 공중전화 부스 두 개가 섰다. 오른쪽 뒤로 산 능선이 구름에 걸렸다.

웅천역
역 앞 주차장은 큰 나무 한 그루가 지키고 있었다. 흰 승용차 여러 대와 짐칸 달린 트럭 두 대가 나란히 섰다. 한 사람이 가방을 메고 차들 사이에 서 있었다. 바닥에 낙엽이 흩어져 있었다. 둥근 표지판 하나가 기둥 위에 섰다. 나무 뒤로 산이 가깝게 솟았다. 주차장 끝에는 돌을 쌓은 낮은 화단이 있었다.

웅천역앞
집 안
마지막 컷은 집 안이었다. 흰 벽 앞 마루에 우유통 모양 화병이 놓였다. 화병에는 길쭉한 잎 몇 장이 꽂혔다. 옆에 작은 병 하나와 액자 하나가 기대 있었다. 벽 위쪽에 걸린 액자 모서리가 조금 보였다. 화병에 꽂힌 것은 끝이 뾰족한 긴 줄기 묶음이었다. 액자 안에는 작은 꽃 그림이 있었다. 문틀이 화면 왼쪽을 세로로 갈랐다.

그때와 지금
이 롤은 한 장소를 정해 찍지 않았다. 지나가다 멈춘 곳이 그대로 컷이 됐다. 건물 틈, 도로, 사람들의 뒷모습, 역 앞 주차장이 한 롤 안에 섞였다. 흑백이라 색 대신 밝고 어두운 차이만 남았다. 흐린 날의 역 앞은 회색이 많아 조금 밋밋했다. 맑은 날 찍은 산책 컷은 그림자가 또렷했다.
외가집 대문은 이제 사진으로만 남았다. 다시 찍는다면 대문을 조금 더 가까이, 문틈 안쪽까지 담겠다. 역 앞은 차가 빠진 이른 아침에 다시 서 보고 싶다. 흑백필름은 계속 쓸 생각이다. 세 번째 롤도 동네에서 시작하겠다.